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짧은 글(261): 상식과 신앙 사이(1)
물론 상식을 신앙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쓰려고 하지만, 내 글의 초점은 상식을 확실한 지식으로 믿는 크리스천들도 있기에 우리 다 같이 그런 상식의 잠에선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누구라도 상식의 틀에 붙잡히면, 헤어나기도 어렵지만, 상식이 자신의 믿음이 돼버려서 남이 어쩔 수 없는 그 개인의 확실한 지식이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리가 되고 마치 신앙처럼 굳어져버리는 걸 보게 된다.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다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런 말이야말로 진정 상식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아주 엄격한 사람이야, 그래서 그는 믿을만한 하지’라고 칭찬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만약 그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의 확신과는 다르게 사람들부터 신앙이 투철한 사람으로 존경 받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도 생겨난다.
누가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적에 그 말의 진의는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의 자랑스러워하는 자부심을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해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에 누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자신은 스스로 죄의 해결사가 돼버린다. 만약에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을 용서하고, ‘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에덴에서 살기를 고집했다면, 인류에게 죄의 흐름의 역사는 에덴의 첫 가정에서 중단되고 말았을까?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주인으로서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불순종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선언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거나 처리해버릴 수 없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를 에덴의 동편으로 쫓아내셨다는 건 그들이 살게 될 세상은 에덴과는 다른 세상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다고 해도 스스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에덴동산의 동편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자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에덴에서 미리 선포해두셨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보다는 오히려 죽는다고 선언해 놓으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그 마음의 뜻을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보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선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단호한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감히 밀어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일진대 누구도 자신의 확신이나 다짐으로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용서는 죄지은 내 속에서 일어나 나를 죄에서 벗겨줄 수가 없다. 다만 오직 주님 안에만 용서가 있다(요3;16-18;요일1:9;시51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자기 오만이고,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는 자랑이고, 자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 누가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라고 하나님께 항의하므로 자신의 정결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그의 얄팍한 속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식이 마치 신앙인 양 생각하고, 아무 의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상식조차 벗어난 우리의 거짓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