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짧은 글(207):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사순절을 지나면서 무엇보다도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그분의 선하심을 알고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너무 상식적인 것 같지만 순순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추구하고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이해하기 쉽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우리 일상의 삶이 아닌가? 내가 추구하는 좋은 것, 그것이 내게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좋하는 것 나두고 굳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탐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선은 모든 피조물의 기본이다.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만물 하나하나를 창조하시면서 후렴처럼 선언하신 말씀이 ‘좋다.’, 곧 선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니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선이다. 인간의 도덕적 선의 근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신들을 나타내보이려고 만든 계율에 뿌리를 둔 것이기에 도덕률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시대에 따라서 개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은 창조질서와 부합되는 선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의 부합에서 나온 선(善)이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 하나님께선 그것을 좋아하신다. 곧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선하게 되고 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좋아하는 것에 지배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를 서로 나누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가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골3:15).
거창한 선행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우리에게 거창한 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거창한 선행일지라도 거창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의 본질에서 벗어난 과장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루하루 지으신 다음에 빛을 지으셔서 ‘좋다’였고, 하늘을 지으시고서도 그냥 ‘좋다’였다. 태양과 달을 지으셔도 그저 ‘좋다’였고, 바다의 동물들과 물고기들을 지으시고서도 한 마디로 ‘좋다’였다. 맨 마지막 날에 사람을 지으시고선 ‘아주 좋다’였지만,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강조하지 않으셨다. ‘좋다’는 원형을 강조해서 ‘심히 좋다’가 전부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급과 최상급으로 강조가 불가능하기에 항상 원형으로 ‘좋다’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엇이든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보다 좋아야 하고, 가장 좋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더 커야 하고, 가장 커야 한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면서 원형을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과장된 우리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원형을 떠나 본질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을 붙잡고 살면서 거인의 흉내를 내며 살려고 한다. 노아시대 인류의 악행이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의 출현과 궤를 같이 했었다(창6:4). 신(Zin) 광야 가데스에서 열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으로 들여보냈을 때에도 거기서 그들은 장대한 거인들인 아낙 자손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곤 모두가 자신들이 본 네피림과 아낙 자손들에 비해서 자신들을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바로 약함으로 받아들이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반항했다가 모래 속에 모두 묻히고 말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하나님의 힘의 원천임을 깨닫지 못할 때, 인간 장수들의 육체의 근육질 앞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약함으로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이다(민13). 하나님의 선하심이 비교할 수 없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