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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04):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정체성 찾기
우리는 흔히 큰 믿음, 혹은 작은 믿음을 구별해서 말하며 믿음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주님께서도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주님께 자신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길 바랐을 때, 그 아픈 딸을 개에 견주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여인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 딸을 고쳐주시기를 바라자,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네 믿음이 크다.’였다. 이 기사(마15:21-28)를 읽은 사람은 누구라도 이왕지사 믿을 바엔 그 여인처럼 큰 믿음을 가져야지라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 여인의 큰 믿음이 그의 딸이 나음을 입은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만난 주님께선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이라 믿고 자신을 지칭해서 개라는 말에도 수치심마저 접어버린 채 뒤로 물러나지 않자 그 여인을 향해 ‘큰 믿음’이라 칭찬하셨다. 사실 그 여인의 큰 믿음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큰 믿음이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했고, 주님이라 부르면서 자신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자라는 자신의 실체를 부끄럼 없이 고백했을 때,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라고 주님께서 긍휼을 보이시며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인의 딸이 나음을 입었다. 큰 믿음은 그 여인이 힘이 있어서 큰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알고 비록 개처럼 낮은 자라도 주님의 긍휼을 바라며 주님의 큰 일을 믿는 그 믿음이 큰 믿음이었다.
자기 딸을 고쳐야겠다는 그 여인의 소원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것이 큰 믿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가나안의 이방인 여인이면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그분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맡긴 그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라 칭찬하신 것이다. 자기 병든 딸을 고쳐주실 분이 곧 메시아이시고, 주님이라고 고백한 믿음, 그것이 그 여인이 칭찬 받은 큰 믿음이다. 더구나 그녀의 큰 믿음이 어떤 효력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 여인을 비롯한 모든 죄인들을 고쳐주시려고 죽으러 오신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 것이 그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칭찬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시자 그의 딸이 나음을 입었다. 주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신 분의 긍휼의 능력이 그 여인의 딸을 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초점을 맞추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다. 사순절에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바로 ‘오직 예수’이다.
마21:18-22까지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곧 말라 죽었다. 그리소 나서 누구라도 가지고 싶어 할만한 ‘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언급하셨다. 누가 산을 향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하면 '이 산(this mountain)'이 바다로 옮겨진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믿음이겠는가? 어쩌면 앞서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신 주님의 기적보다 더 큰 믿음이 될 수도 있겠을 터. 여기서 우리가 신중하게 큰 믿음의 필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기적엔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고 산을 바다에 빠뜨린다고 해도 그 기적이 과연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 보자. ‘왜 내가 이런 일을 했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주님께서 ‘이 산’이라고 지적하신 것은 이유가 있다. 주님께선 당시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셨고, 하룻밤을 베다니로 나가셔서 주무신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 없음에 대한 저주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 결국 무화과나무는 죽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시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이 세워진 그 산이 마치 바다에 빠지듯 던져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후 70년 성전은 무너졌다. 제자들의 큰 믿음이 산을 무너지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산을 바다에 던져넣으신 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큰 믿음이다. 주님 한 분의 새 언약이 바로 거기서 출발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