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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97): 인간 도덕성의 뿌리는 어디인가?
우리가 스스로를 도덕적 인간으로 묘사하며 마치 도덕만이 인간의 가치를 올려준 것처럼, 다시 말해서 언제나 인간의 존엄이나 가치를 빛내주는 것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도덕률인 것처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디서든 얼마만큼이나마 도덕성을 지녔든지, 그렇지 못하다는 평판을 듣든지 별로 상관치 않고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워 교훈하기에 바쁘다. 물론 자신도 도덕성과는 별 관계없다는 걸 스스로 알면서도 도덕적 가치를 높여 자신을 그 위에 세워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인간 도덕성의 허구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싶다.
그런데 크리스천들까지도 도덕과 관련해선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중국 땅의 공자를 앞세워 이야기하면서도 공자의 도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일 뿐, 도덕적 인간이 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없도록 지으셨다. 도덕률이나 율법으로 통해 자신의 도덕성을 드러내려고 할 때, 이미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선한 척 하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선 자신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셨지만, 인간은 도덕의 근본이 되는 두 요소, 즉 선악의 지식을 애당초 금하신 사실을 모르는 척 무시해버리는 경향도 있다. 오히려 도덕적 인간이란 말에 열광하고, 그것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인 양 가르치기도 하고, 도덕률에 맞춰 살라고 교훈하고 명령한다. 그리고 누가 조금이라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면, 그를 도덕군자인 양 떠받들려고 야단치다 보면 어느새 그를 우상화 하는 경향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 인간의 도덕의 근원은 첫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 된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인간 타락의 증표로 얻은 선악의 지식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이것은 옳고 선하다’, ‘저것은 옳지 못하고 악하다.’라고 지적해서 결국 사람들이 행하고 싶은 도덕률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 도덕의 뿌리는 바로 타락한 인간이다(창3:22). 에덴에서 하나님의 선악의 지식을 습득한 죄로 에덴에서 쫓겨나 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곁을 떠났으니 인간은 나름대로 도덕률을 만들어 ‘좋다, 혹은 안 좋다.’ 혹은 ‘악하다.’라고 이름 붙여서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도덕의 주인 노릇! 거창하지 않은가? 자기 스스로 선악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으니 그것이 인간의 하나님 노릇이 아닌가? 누구든 스스로 도덕군자가 돼 보라. 그는 항상 하나님과 자리다툼을 벌이게 돼 있다. 도덕군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이지 않으니 은혜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이 스스로 도덕적 인간임을 자랑할수록 하나님께로 다가가기가 어렵다. 누구든 자신이 마음대로 선과 악을 정하면 얼마나 좋고, 권위가 있어 보일까? 왜 그것을 구차하게 하나님께 물어야 하겠는가? 인본주의는 바로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면서 생겨난 이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가 어떤 악을 저지르기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으시고, 그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선언해 놓으셨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을 모르도록 조치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선악을 구분해서 도덕적 인간이 되지 말라는 뜻이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사전에 알게 하셔서 그것을 경고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도덕적 인간만큼 다루기 힘든 존재가 없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선악의 지식을 자기 마음대로 행사하며 하나님의 선악의 지식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선(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 선을 인간이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사용하면 그것이 곧 악이라는 걸 선언해 놓으신 것이지만, 선악의 지식이 마치 자기 소유인 양 도덕군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죽을죄라는 걸 처음부터 선언해 놓으신 걸 모른 척 한다.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률은 겉으론 화려하고 멋있어 보여도 하나님의 선(善)과는 차원이 달라 접근조차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