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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02): 가난을 모독한 영화 ‘기생충’ 이야기(2)
‘기생충’의 영화감독은 지음 받은 그대로가 아니라, 진화돼 전혀 달라진 기생충 이야기를 그리면서 오늘 날의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가난이 진화되거니 혹은 퇴화되면 영화 속에서 묘사한 험상궂은 기생충의 모습, 곧 예측 불허의 거짓말과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흉측한 가난으로 퇴화된 된다는 걸 그린 영화는 아닐까, 이런 의심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 어쩌면 가난이 ‘기생충’이란 영화에서처럼 흉측하게 변해버릴 수 있겠다 싶다. 더구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는 간절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부와 가난의 공멸을 가져오는 비극적 상황이 도래할 것 같다는 게 내가 영화 ‘기생충’을 본 소감의 일부이다.
과연 인간의 비극이 가난에서 생겨난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세상의 가난한 모든 자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은 하나님을 떠나서 죽게 된 자의 삶이 최고의 가난, 곧 죽음에서 정점을 찍는다. 죽음이 최고의 가난이란 말을 음미해 보기를 권한다. 아마도 그래서 살아있을 때 부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 ‘풍요의 복음’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부자 되는 헛된 꿈을 꾸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선 가난은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치 않으시고, 마리야가 옥합의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을 때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12:5)’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척 위선을 떨었을 때 주님께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8).’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선 가난은 소위 돈이나 물질로 세상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대신 가난은 모두가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밝히신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탐욕을 제어해줄 만큼의 물질적 부(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물질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밑도 끝도 없이 넓고, 깊고, 크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님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은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8:9).’ 주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으로 원천적으로 부요하신 분이지만, 사람의 아들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가난의 표본이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최고의 가난을 온 몸으로 감당하셨고, 그분의 죽음의 가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영적 부요를 안겨주신 분이 부와 가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탄이 주님을 시험했을 때 그 시험의 키포인트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스럽게 살지언정 사람의 아들로 죽지 않기를 바라는 시험했지만, 주님께선 그 시험을 이기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면서 자신을 시험했던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것을 보면 사탄이 주님의 죽으심의 가난을 얼마나 막으려 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주님께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의 최후의 가난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셔서 영원히 풍성케 해주신 것이다. 영원한 영적 풍요를 위해선 가난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함을 몸소 알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은 온갖 거짓말로 부자를 속여서, 아니 세상을 속여서 부자행세를 해보았지만, 결국 살인자로 가족들과도 헤어져 그 부잣집의 깊은 지하에 갇혀 있다가 어쩌다 한 번씩 계단으로 올라가서 자기 아들을 만나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타락한 가난은 하늘에 오를 수가 없고, 결국 부잣집의 지하에서 나와 환한 햇빛을 바라볼 수도 없다. 영화 ‘기생충’은 가난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탐욕의 끝판을 보여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