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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의 단상>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땀흘리며 각자의 고난으로 이룬 것들이 많다 생각하고, 자신의 땀으로 일군 승리를 앞세워 자신의 고난의 열매인 승리를 즐기는 걸 당연시 하는 부모와 자신들의 삶과 자녀들을 성공시킨 쾌거를 스스로 기쁘게 여기며 그 동안 흘린 땀을 자랑스러워 하며 너무나도 당연시 열매를 누리고 살지만, 크리스천들로서, 혹은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란 영적 신분의 삶은 육적 신분의 삶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란 생각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진정 이상하지 않은가?
주님께선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의 잉태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곧 성육신으로 인자로 태어나신 사실을 주님께선 어떻게 처신하셨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기로 태어난 후 정결예식을 위해 부모 품에 안겨 예루살렘에 갔을 때, 거기서 시므온이란 사람과 84세 된 안나라는 선지자가 그 아기를 보고선, 시므온은 아기를 그리스도로 맞이했고, 안나는 예루살렘을 속량할 구주로 맞았다(눅2).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12살 된 소년 예수를 데리고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그들 부부는 소년 예수가 유월절 어린양이란 사실을 잊고 살았다. 마리아는 소년 예수를 향해,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7-48).’ 나무랐지만, 소년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제시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있던 시므온과 선지가 안나가 알고 있던 속량의 주 메시야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영적 가정임을 잊은 것 같다. 우리의 삶은 그저 육적 가정의 가난이 온 식구들의 고난이라 여기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님의 고난은 인자로서 자신이 속한 한 가정의 생계를 돕는 노동의 고난과는 전혀 다르게 사셨다. 한 가정의 식구 중 한 아들로, 더구나 장남으로서 온 가정을 위한 땀흘림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일하셨지만, 그런 삶을 고난이라 말씀치 않으셨다. 그런 고난은 어쩌면 사람의 모습을 지닌 인자에겐 그저 슬쩍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될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려고 나무에 달려 죽기 위해 오신, 실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어떤 죽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뺨을 맞고, 침 배틈을 당하신 모욕과 조롱과 단 벌 옷까지 빼앗긴 알몸으로 당하신 모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유대교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밤새 진행된 불법재판의 결론은 결국 사형 선고, 그들은 스스로 돌로 쳐죽이고 싶었지만, 사형 권한이 로마 정권에 있기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유대 백성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총독에게 넘겨주지 않았는가? 사도 신경에선 유대인들의 죄를 삭제하고,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히고,’라며 되풀이 외우게 되었을까? 어느 백성들이 자신들을 살리러 오신 자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법이 아니라, 백성들의 미움과 질투로 십자가에 못박는 사형 집행이 과연 다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서 자행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목적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영적인 가정, 곧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인 가정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육신의 가정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을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으로 삼으시려는 뜻을 주님은 이렇게 밝히신 적이 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주님을 찾아갔을 때, 주님께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요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12:48)’ 물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내 어머니와 형제’라고 선언하셨다. 그 이유가 바로 혈연적 가정을 넘어 영적 가정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다. 끝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주님의 고난의 목적을 미리 선언해 놓으신 사실을 오늘의 가정, 오늘의 교회가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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