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애댱초 왜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는가? 3
애당초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다! <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 가정과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눅15:1-32). 탕자의 비유는 우리 각자가 속해 있는 일반 가정의 흔한 모습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몸된 교회의 현재 모습일 수도 있다. 한 가정의 어느 자녀가 자신의 몫을 미리 챙겨 부모와 형제를 떠나는 모습은 언제든 어느 가정에서든 일어나는 흔한 영적 부패 현상일 수 있다. 부모와 그 가정을 떠나는 순간 그 자녀의 정체성은 부패한 불쌍한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자신의 호주머니에 채워진 재물도, 그의 출세도, 성공도 그를 지켜줄 깨끗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그에겐 부모가 있어도 자의로 부모를 잃은 진정 불쌍한 자이다. 자녀의 나름대로의 성공 개념이 바로 아버지 없는, 고아가 아닌 고아, 곧 (fatherless)가 되었다면, 그가 곧 탕자이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했기에 탕자가 된 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와 가정을 외면했기에 탕자가 된 것이다.
실제론 고아가 아닌데 자의로 고아가 된 자가 누구인가?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 대신 바로 제 몫의 돈을 챙겨서 아버지를 떠난 자가 곧 아버지를 떠났거나 버린 자로 탕자란 말이다. 그가 손에 쥔 돈 혹은 재물이나 출세가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 대신 재물이나 자신의 출세를 앞세워 스스로 독립했다고 생각하는 자가 바로 아버지를 떠난 탕자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비유 속 한 집안의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순간 아버지 없는 자, 곧 탕자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던 큰 아들을 일컬어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그는 혈육인 형제 동생을 외면하고 버린자였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를 버린 자는 결국 아버지를 버린 자요, 가정을 뒤틀어버린 동일한 탕자이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 대해선 한 마디의 책망도 없었지만, 돌아온 동생을 불평하고 거부하는 큰 아들에 대해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걸 듣게 된다. 큰 아들은 비록 집과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지만,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잊고 대신 자신과 자신의 소유만을 믿고 살던 살던 탕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와의 생명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살던 탕자였다. 더구나 아버지 곁에서도 아버지의 긍휼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진정 불쌍한 탕자였다. 어쩌면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 집을 떠났을 때, 그 역시 아버지와 가정을 떠난 자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동생이 집을 나갈 때 그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동생을 자유인으로, 자신을 아버지에게 붙들려 자유를 잃은 자로 불평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우리 역시 교회에, 혹은 하나님께 붙들려 자유를 잃은 노예처럼 살고 있고, 교회에 속해있으면서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자가 되었거나 교회가 하나님의 가정이면서도, 식구가 아닌 손님처럼 취급받는 그런 지체도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를 버린자, 혹은 교회가 자신을 버렸다며 분노로 살아가는 탕자의 형같은 존재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