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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바르게 알고 지키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주제의 글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난 번 글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정체성인 존재의 영원성과 같기에 미리 살펴본 바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선 창조의 첫 날에 빛을 창조하신 후 어둠을 나누어 밤과 낮, 곧 하루라는 시간을 창조하셔서 모든 피조물을 시간 속에 보관하셨다. 시간이 제로화되면 모든 피조물이 한 꺼번에 사라지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더구나 모든 피조물은 각각 다른 피조물과 시간 상 차이가 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것이 창조될 수 없다.
창조주께선 창조의 선후관계를 각각 다르게 하셨기 때문에(창1장의 묵상이 필요함), 모든 피조물이 시간상으로 다르기도 하지만, 더구나 사람은 다른 피조물에 비해 제일 마지막에 창조되었고, 첫 사람 부부는 결국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난 후에 자녀를 가졌기에 사람의 출생의 역사는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외모는 어느 정도 닮은 사람은 있어도 동일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동일한 두 개가 존재하면, 그 두 개는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모든 생물의 자연 출산이 시간상으로 각각 다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 형제였지만, 장차남의 순서가 어머니 모태에서 하나님에 의해 바뀐 걸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에서 바뀐 사실을 말씀해 두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자체가 선택에 의한 것이고, 선택의 역사엔 하나님의 깊은 긍휼이 작용했고, 하나님의 긍휼에서 선택이 시행된 걸 알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 바로 왕의 손에서 구원해 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롬19:14), 이어진15절엔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소개되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모든 피조물은 이미 강약으로 구분돼 있으니, 약하거나 못난 것을 불쌍히 여기시겠다고 선언해 놓으신 것. 모든 피조물의 강약의 조화는 창조질서에 필연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 또한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중에 선택만큼 비판받는 은혜도 없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억지다. 사람이 각각 다르고 선후도 다르니 공평치 않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의 긍휼로 선택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이미 밝혀 놓으신 걸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이해하려면, 모든 인간은 각각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각각 다르게 지으신 하나하나를 불공평하게 지으셨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각각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해도 동일하지도, 공평하지도, 만족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각자의 다름을 다름에 맞게 대하는 것이 공평하고 정직한 은혜가 아닌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만큼 공평한 것이 어디 있는가? 각각 다른 사람을 다르게 선택해 대우하신 것이고, 그 선택의 기준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에서, 곧 불쌍히 여기심에 기초한 것이다. 더 좋고 더 강한 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약하고 불쌍한 자를 선택하신 것. 하나님의 선택은 특혜가 아니라, 약자를 불쌍히 여기신 긍휼이다. 모두가 망가진 상황에서 긍휼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